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당시 오스트리아의 Freiberg라는 작은 마을(현재는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유태인 아버지 Jacob Freud와 어머니 Amalie 사이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Amilie는 Jacob보다 19세 연하였으며 그의 세 번째 아내였다. 프로이트가 출생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전처에게서 태어나 이미 장성한 두 명의 이복형제가 있었다. 프로이트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으나 생후 8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그 이후에 다섯 명의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프로이트 가족은 반유태주의를 피해 1859년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로 이주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직물상이었던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유태인으로서 사회적 제약과 수모를 경험하며 많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는 첫아들에 대해서 사랑과 긍지를 느꼈으며 많은 기대를 지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프로이트는 2세경에 어머니의 벗은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 대한 성적 애착을 느꼈다고 그의 전기작가인 Jones(1963)는 기술하고 있다. 프로이트와 어머니의 관계는 비교적 갈등이 적었으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복잡했던 것 같다. 1896년 부친이 사망했을 때 프로이트는 심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기분석을 시작하여 정신분석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프로이트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분석 이론에서 성욕설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유태인이었던 프로이트는 당시의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었으며 기존 학문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더불어 모세와의 동일시를 통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지자의 역할을 동경했다는 주장도 있다.
프로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전기적 자료는 빈약한 편이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으나 학생시절에는 반에서 늘 수석을 하였으며 문장력이 우수했다고 한다. 독서를 많이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유태인들은 상업, 법률,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이트는 처음에 의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자연현상보다는 인문학적인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연을 찬미한 괴테의 수필을 접하면서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로이트는 1873년에 비엔나대학교의 의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유태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열등감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험을 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독립적인 판단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5년 만에 끝내는 의학공부를 8년간 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유태교의 이상에 따라 지혜로운 학자가 되기를 바라며 지원했다.
프로이트가 성장한 19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학문적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1874~1876년에 Frantz Brentano의 철학세미나에 참석하였으며 물리학, 생물학, 동물학 등을 공부했다. Karl Claus의 동물실험실에서 연구하였으며, 1877년에는 뱀장어 수컷의 생식기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Darwin이 주장한 진화론의 지지자인 Ernst Haeckel로부터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발생학적 이론을 배우기도 했다.
1876~1882년에 프로이트는 실험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Brucke 교수의 생리학 실험실에서 일하였으며 이때 Josef Breuer를 만나 히스테리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1881년 3월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년간 Brucke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프로이트는 1882년 6월에 Martha Bernays와 약혼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대학의 연구자가 되기보다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1884년 1월에 정식 신경과의사가 되었으며 1885년 2월에는 교수자격과정을 마치고 신경병리학의 강사가 되어 코카인 복용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이 당시부터 간헐적으로 우울감, 피로감, 초조감 등의 신경증적 증상을 경험했으며 코카인을 통해 진정시키곤 했다. 이러한 증상은 프로이트가 자기분석을 통해 극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생겨난 편두통은 전 생애 동안 치료가 잘 되지 않은 채 프로이트를 괴롭혔다.
1885년에 프로이트는 프랑스에서 연수할 기회를 얻어 파리 대학에서 최면치료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Charcot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접하게 된 최면치료의 경험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엔나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경과의사로 개업한 프로이트는 다양한 증상의 환자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치료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최면치료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유연상법이라는 새로운 치료방법을 시도하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이론체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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